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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리더십 200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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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무형(無形)의 지휘관

한(漢)나라는 초기에 흉노족과의 충돌이 잦았습니다. 흉노는 북방 유목민족으로 종족 대다수가 말을 잘 타고, 활쏘기에 뛰어나 한나라는 흉노족과의 싸움이 쉽지 않았습니다. 사기열전에는 흉노와 싸움을 벌인 장수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이광(李廣)은 매우 돋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광은 오늘날 중국 깐쑤성(甘肅省) 농서(隴西)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몸이 빠르고 무예에 능했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았습니다. 이광은 한 문제(文帝) 때에 군에 입대하여, 경제(景帝)를 거쳐 한 무제에 이르도록 거의 매번 흉노와의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크고 작은 70여 차례의 전투에서 놀라운 공(功)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공적 때문에 흉노족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사기가 떨어졌으며, 그를 날아다니는 장군 곧,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습니다.

이광의 용병은 알기 쉽고, 부하를 아꼈으므로 모두가 기꺼이 그의 지휘에 따랐습니다. 이광은 행군 중이라도 물이나 풀이 있으면 부대를 쉬게 하고, 자유롭게 풀어주었으며, 밤에는 조두[刁斗, 구리로 만든 밥 짓는 솥. 낮에는 밥을 짓고 밤에는 징으로 썼으며, 식량을 지급받는 데도 사용함.]를 쳐서 방위하는 번거로움도 없앴습니다.

또 지휘부에서 군사 행정을 처리할 경우에도 형식적인 문서 작성이나 장부 기재를 극도로 간소화하였을 뿐 아니라, 출격 시에도 부대를 편성하거나 진형을 취하지 않고 수초가 무성한 곳에 주둔하였습니다[풀이 무성한 물가에 진을 치는 것은 병법에서 금하는 일입니다].

이러다 보니 이광의 부대가 진군할 때 언뜻 보면 오합지졸(烏合之卒)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광은 척후병(斥候兵)을 멀리까지 세워 경계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기습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한편, 당시 이광과 함께 명성을 날리던 정불식(程不識)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정불식은 경제 때 직간을 자주하여 나중에 대부(大夫)에 오른 인물로, 사람됨이 청렴하고 법을 엄격하게 집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불식의 통솔 방법은 이광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의 부곡[部曲, 장군 밑에 五部가 있고, 部 밑에 또 曲이 있음]은 대오와 진영이 항상 질서정연했고 밤에는 조두를 정확히 두드려 경계를 엄히 했으며 군리(軍吏)에게 군의 장부를 지극히 정확하게 정리하도록 요구했으므로 군사들은 밤을 지새우고 해가 뜰 때까지 일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정불식이 언젠가 이광의 부대 지휘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군대는 지극히 간략하여 적이 졸지에 습격한다면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졸들은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니, 모두 기꺼이 이광을 위하여 죽으려 한다. 우리 군대는 번잡하지만, 그래도 오랑캐는 감히 우리를 범할 수 없다.”

남송 때의 학자인 대계(戴溪)는 이광과 정불식에 대해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이광이 부대관리를 간소화 일변도로 실시한 경우와 정불식이 지나치게 번잡한 부대관리를 한 경우는 모두 실책이었다. 지나치게 군 관리를 간소화시키면 병사들이 안이하고 태만해져서 경계심을 잃고 실수를 범하게 되며, 긴급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적절히 대응할 방법이 없게 된다.

반대로 지나치게 번잡스러우면 병사들이 피로하여 지치고 지휘 계통이 요란하여, 적시에 작전 명령을 받들어 시행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작전 상황이 벌어지기도 전에 자군의 전력이 먼저 지치게 된다. 그러므로 간소와 번잡 그 중간을 택하여 시행하는 것, 이 방법이 최선일 따름이다. 부득이해서 어느 한 쪽만을 택한다면, 차라리 정불식의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다. 이광의 부대관리 방법은 전혀 본받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남송은 여진족에게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 간 나라이고 결국 칭기즈칸에게 멸망당하는 나라로, 적어도 ‘부대관리 방법’에 관해서는 본받을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반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때, 둘의 나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을 취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고 합니다만, 세상일 가운데 그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장점과 단점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자기가 선택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할 따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대계의 평은 얼른 듣기에는 종합적일지 모르나, 실제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백면서생(白面書生)의 불평’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휘 방법은 달랐지만, 이광과 정불식은 당대의 명장이었습니다. 이름은 헛되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장군 열전을 보면 정불식보다 이광을 더 높이 칩니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준비하고, 세밀하게 일의 진행상황을 살피는 것이 꼭 잘못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광과 정불식 두 사람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지휘방법을 세웠고, 그것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광과 정불식을 상대했던 흉노가 ‘이광의 전략을 두려워했다(然匈奴畏李廣之略)’는 것, ‘많은 병사 또한 이광을 따르게 되면 즐거워했고, 정불식을 따르게 되면 고통스러워했다(士卒亦多樂從李廣而苦程不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역시 이광처럼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다른 사람을 감화시켜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하며,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을 알아서 하게 하는 것이 가장 수준 높은 지휘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이광은 ‘지휘하지 않으면서’ 지휘했고, 많은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따르게 한 ‘무형(無形)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광에게 매력을 느끼고 삶의 사표(師表)로 삼은 것은 이광에게서 마음을 얻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웠기 때문입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삶의 태도에서는 향기가 묻어납니다.

이광은 청렴하여 상을 받으면 항상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음식은 병사들과 똑같은 것을 먹었습니다(廣廉 得賞賜輒 分其麾下 飲食與士共之). 그는 죽을 때까지 40여 년 동안 2,000석의 관직에 있었지만, 집안의 재산에 대해 말하는 법도 없었고 죽은 뒤에 집에는 돈 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말재주가 서툴러 남과 같이 있을 때도 별로 입을 여는 일이 없었으며, 쉴 때는 늘 땅에 그림을 그려 진형(陣形)을 연구하거나, 활 쏘는 내기를 해서 지는 사람에게 벌주를 먹이는 것으로 소일했습니다.


또한 이광은 마실 물과 식량이 떨어졌을 경우, 물을 보면 병사들이 물을 다 마신 뒤가 아니면 물 가까이 가지도 않았으며, 병사들이 다 먹고 난 뒤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그럽고 넉넉하며 가혹하지 않아 병사들은 이광을 존경하고 그에게 쓰이는 것을 즐거워하였습니다(乏絕之處 見水 士卒不盡飲 廣不近水 士卒不盡食 廣不嘗食 寬緩不苛 士以此愛樂為用).

이광은 자기와 일하는 사람들의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살며, 마음을 얻어 뜻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중석몰촉(中石沒鏃)

이광은 적인 흉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으나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이광이 병들고 부상까지 당해 흉노에게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이광을 잡은 흉노가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흉노의 선우(單于: 흉노의 우두머리)가 “이광을 잡거든 반드시 산 채로 데려오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 이광은 눈부신 무용으로 흉노 진영을 탈출하여 본대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많은 병사들을 죽게 한데다 흉노에게 생포되었다는 이유로 참형의 판결을 받았는데, 이전의 공으로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됩니다.

이광이 서민이 되어 쉬는 동안 흉노가 강성해져 요서태수를 죽이는 일이 일어나, 황제는 이광을 다시 우북평 태수로 부릅니다. 이광이 부임하자 흉노는 두려워 우북평으로는 몇 해 동안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이광이 활을 잘 쏜다는 얘기를 하였는데, 우북평 태수 시절에 활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남아있습니다. 원래 이광은 키가 크고 원숭이처럼 팔이 길어 천부적으로 활을 잘 쏘았습니다(廣為人長 猿臂 其善射亦天性也). 그의 자손들이나 다른 사람이 이광에게 열심히 궁술을 배워도 도저히 그를 따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풀숲에 있는 돌을 호랑이로 잘못 보고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돌에 박혔습니다(中石沒鏃). 다시 보니 돌이었으므로 다시 쏘아 보았으나 돌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이 돌은 지금도 ‘사호석(射虎石)’이라 불리며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볼거리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호석(射虎石)’이 볼거리로 남아있다면 ‘중석몰촉(中石沒鏃)’이란 말은 지금까지도 ‘정신을 집중해서 힘을 다하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이야기와 비슷한 것이 『한시외전』(韓詩外專)에도 초(楚)나라의 웅거자(熊渠子)란 사람이 역시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이 ‘화살 깃까지 묻힐 정도로 돌에 깊이 박혔다’(射石飮羽)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도 힘든 일이 닥치면, ‘중석몰촉(中石沒鏃)’이란 한자 성어를 생각하며, 사람과 관계된 일 가운데 못할 일은 없다고 마음을 다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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