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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도층의 희생과 대동법 200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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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층의 희생과 대동법,

天災에서 나라를 건져내다

이덕일의 事思史:


20090705


유례를 찾기 힘든 경신 대기근을 맞아 조선은 기민(饑民) 살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소빙기(小氷期)의 재앙에 맞서 수도(修道)하는 자세로 재난 극복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망국 지경까지 갔던 나라가 되살아났다. 위기를 맞이하고도 당리당략 외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 정치권이 되돌아볼 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18세기께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해동지도’의 경기도 편. 조정은 대동법 등으로 확보한 곡식을 조운을 통해 기근이 든 고장에 옮긴 다음 기민 구제용으로 풀어 많은 백성을 살렸다.


三宗의 혈맥 현종⑤ 대기근 극복

현종 11년(1670:경술년)∼12년(신해년)의 경신 대기근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변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현종 11년 8월 전라감사 오시수(吳始壽)는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고, 무리를 지어 겁탈까지 했으며, 조금 익어 가는 곡식이 있으면 전주(田主)를 묶어 놓고 공공연히 베어 가며 들판에 방목하는 소와 말을 대낮에 잡아먹지만 감히 물어보지도 못합니다”(『현종실록』 11년 8월 10일)라고 보고했다.

한해(旱害:가뭄)·수해(水害)·냉해(冷害)·풍해(風害)·충해(蟲害)의 오재(五災)에 인간 전염병과 가축 전염병이 가세한 칠재(七災)였다. 여기에 겨울 혹한(酷寒)까지 팔재(八災)가 되었다. 전라감사는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는데 집에 조금의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합니다. 심지어 무덤을 파내 관을 쪼개 시신의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현종개수실록』 12년 1월 11일)라고도 보고했다.


현종 12년 2월 보성군의 교노(校奴) 일명(日命)과 남원부의 어영군(御營軍) 김원민(金元民) 등이 무덤을 파 옷을 벗겨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각되었다. 대명률(大明律) ‘발총(發塚:무덤을 파헤침)’조는 “관곽(棺槨)을 열고 시신을 본 자는 교수형”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도 이들은 추위가 극심했기 때문이라고 무심하게 자백했다. 경상도도 마찬가지였다. 경상감사 민시중(閔蓍重)은 그해 4월 참혹한 정경을 보고했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10여 세의 어린 아들이 이웃집을 도둑질했다고 물에 빠트려 죽였으며, 또 한 여인은 서너 살짜리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 않고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의 굶주린 한 백성은 죽소(粥所:죽을 제공하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 아내는 곁에서 죽을 다 먹고 난 다음에야 곡했습니다.”(『현종실록』 12년 4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은 관아 창고에도 손을 댔다. 현종 12년 11월 함경도 길주(吉州)의 허홍(許泓) 등 150여 명은 관고(官庫)의 감관(監官)이 진휼곡 대출을 미루자 관고에 난입해 곡식 35석을 3두씩 나누어 가진 후 각자 이름을 써 후에 환납(還納)하자고 약속했다. 함경감사 홍처후(洪處厚)는 주동자 5인을 강도률(强盜律)로 목을 베려 했으나 영의정 허적과 이단하 등이 감관의 잘못도 있다고 옹호해 가볍게 처벌했다. 그러나 반란사건에 대한 처벌은 강력했다. 금산의 향청(鄕廳) 좌수(座首) 이광성(李光星) 등이 50여 명을 모아 덕유산 깊은 계곡에 진을 치고 용담(龍潭)·무주현의 무기와 곡식을 탈취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는데 반역으로 규정되어 39명이 사형당했다. 이런 와중에 병사자와 아사자가 잇따랐다.

“이달에 서울에서 굶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가 1460여 명이었고 각 도에서 죽은 수가 1만7490여 명이었다…도적이 살해하고 약탈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영남이 가장 심했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와 가축도 다 헤아릴 수 없었다.”(『현종실록』 12년 6월 30일)

6월 한 달 동안 1만7000여 명이, 8월에는 서울에서 250여 명, 각 도에서 1만5830여 명이 죽었다. 소빙기가 불러온 대재앙이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국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종 11년 7월 23일 “관고의 곡식도 이미 바닥났다”면서 “오늘의 계책은 온갖 벌인 일들을 정지시키고 번잡한 비용을 줄여 오직 구황 정책에 전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고 건의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굶주린 백성 살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태화는 진휼청(賑恤廳)을 상시 가동하고 인상했던 관료들의 녹봉도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닷새 후인 7월 2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재난대책회의가 열렸다.

병조판서 김좌명은 “어영미(御營米) 5000석을 취해 사용하되 군량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자를 더해 다시 갚아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전시 대비 비축곡까지 임시로 방출하겠다는 뜻이었다. 진휼에 쓸 총 가용 경비를 뽑아 보니 ‘은 7100냥, 포 960동, 쌀 3만 석, 벼 1만 석’이었다. 왕실에 바치는 각종 공물과 관리들의 녹봉을 줄이면 쌀 3만6760석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임금은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금주했으며 백관은 봉급을 줄여 만든 비용으로 기민(饑民) 살리기에 나섰다.


병자를 치료하는 활인서(活人署)와 죽을 제공하는 진휼소(賑恤所)가 중심이었다.

현종 12년 1월 16일 선혜청·한성부·훈련원 세 곳에 진휼소를 설치했는데, 『현종개수실록』은 “첫날 죽을 먹은 자가 6000여 명이었고 다음 날에는 1만 명을 훨씬 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진휼소에 나올 수 없는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에게는 따로 곡식을 제공했다. 기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1월 25일에는 1만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한성부는 삼강(三江)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조석으로 진휼소까지 오기 어렵다면서 용산과 홍제원에도 진휼소를 설치했다. 지방 각 관아도 진휼소를 운영했다. 또 동소문 밖 연희방의 동활인서, 남대문 밖 용산강의 서활인서에서는 병자들을 치료했다.

현종 12년 5월 비변사는 “두 활인서에 1000여 명의 병자가 있고 사막(私幕)에도 7860여 명이 있다”면서 “막에서 나간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죽은 자가 많다는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만합니다”(『현종실록』 12년 5월 11일)라고 보고했다.

진휼소 덕분에 무수히 많은 백성이 살아났지만 곡식이 부족해 무한정 운영할 수도 없었다. 『현종실록』 12년 5월 15일자는 “각 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보릿가을 철이 되었고 또 안팎의 저축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쫓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 진휼소의 3만2040여 명 중 서울 백성 1만957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 먹을 양식을 주어 보냈다. 자활하라는 뜻이었다.

마지막 방안은 청나라에서 곡식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현종 11년 겨울부터 일부 관료가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현종 12년 6월 형조판서 서필원(徐必遠)이 공사 간의 모든 저축이 바닥났다면서 “외간에서 곡식을 빌리자는 의논이 많아 감히 아룁니다”라고 공론화했다.


그러나 『현종실록』은 “불가하다는 신하가 많아 서필원의 의논은 시행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굶주린 백성 앞에서도 이념을 앞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대기근을 정략에 이용하는 당인(黨人)도 있었다. 현종 12년 12월 5일 헌납 윤경교(尹敬敎)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토착 농민의 수를 온 나라를 합해 계산하면 거의 100만 명에 이릅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경교의 상소는 남인 영상 허적(許積)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종은 영의정 정태화가 재위 12년 칠순이 되었다는 이유로 거듭 사직을 요청하자 그해 5월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정치화(鄭致和)를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윤경교는 남인이 영의정으로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뜻에서 현종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심지어 “전하께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시상(時相:허적)의 말은 모두 굽혀서 따르시면서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유현(儒賢:송시열)의 아룀에 대해서는 어찌 한결같이 머뭇거리고 어렵게 여기십니까”라고도 비판했다.

현종은 크게 분개해 “윤경교는 간관(諫官)으로 오래 있으면서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일언반구도 없었다…당(黨)을 끌어들이고 남의 뜻에 부합했다”고 비판하면서 체차(遞差:갈아치움)시켰다.


이처럼 대기근 앞에서도 당리당략을 앞세운 일부 무리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기근 극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하늘이 왕조를 버린 듯한 천재(天災)가 왕조 타도 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동법도 큰 역할을 했다.


경신 대기근을 극복한 현종 14년 11월 전 사간(司諫) 이무(李무)는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대소 사민(士民)이 서로 ‘우리가 비록 신해년(현종 12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 대동법 이전에는 농지 한 결(結)에 쌀을 60두씩 바쳐도 부족했지만 대동법 이후에는 한 결에 10두씩만 내어도 남습니다. 만약 대동법을 혁파한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흩어져도 구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승정원일기』 현종 14년 11월 21일)


국가나 정치권이 백성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는 좋은 정책과 시의에 맞는 법 제정이란 뜻이다.


이덕일






부국강병의 길 특권이 막았다

| 제125호 | 20090801 입력



지배층만 부유한 나라보다 다수 백성들이 부유한 나라가 강국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수 백성들을 잘살게 하자는 민생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정치가의 단골메뉴였지만 많은 경우 현안 회피용에 불과했다. 어떤 정치세력이 진정으로 민생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민생을 위한 법제화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三宗의 혈맥 숙종③ 민생 개혁의 좌초

갓 즉위한 숙종이 안으로는 각 당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대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민생을 보존하며, 밖으로는 내전에 휩싸인 청나라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다. 그러나 숙종은 조숙했다. 숙종은 재위 1년(1675) 11월 허적과 허목을 불러 만경창파에 일엽편주가 떠 있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배가 닻줄과 노도 없이 물결 가운데 있다가 바람을 만나면 반드시 뒤집힐 염려가 있으니 이는 임금의 도(君道)를 미루어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림 위에 숙종이 쓴 어필이 있는 『어제주수도설(御製舟水圖說)』이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다섯이 있으니 첫째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 어진 현량(賢良:어질고 착한 사람)을 쓰는 것이고, 셋째 충간(忠諫)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넷째 과실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다섯째 보물을 천하게 여기고 어진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숙종실록』 1년 11월 8일)”

숙종이 재위 1년 윤5월 평안도 관찰사 민종도(閔宗道)에게 한 말은 조선 정치구조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발해 건국지인 동모산 부근의 강과 평야. 길림성 돈화현에 있는데, 발해 유적지는 동북공정에 따라 한국인들의 접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당론이 선조 조부터 성하기 시작해 효종 조에 이르러
서는 송준길·송시열이 두소(斗7B72:국량이 작음)의 비루하고 미세한 무리로서 유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산림에 물러나 있으면서 조정의 권력을 멀리서 잡고 무릇 인물의 진퇴나 크고 작은 정사도 반드시 먼저 이 두 사람에게 품의한 후 (임금에게) 상달(上達)했으니 일이 극히 한심했다.(『숙종실록』 1년 윤5월 27일)”

영의정부터 송시열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나서 임금에게 진달했던 서인 정권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숙종은 선왕의 유지를 이어 정권을 갈아치웠지만 남인의 당세는 미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숙종의 마음을 끈 것은 그의 정책관이 기존 관료들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타파해 백성들을 살림으로써 그 역량으로 북벌을 단행하자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윤휴가 북벌을 주창하자 북벌 반대론자들은 민생우선론인 양민론(養民論)으로 맞섰다. 윤휴는 양민론이 북벌의 현실화를 막기 위한 사대부들의 허울 좋은 명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동법 이후 민생의 가장 큰 문제는 신역(身役:병역)의 폐단이었다. 조선은 16세부터 60세까지 병역의 의무를 졌는데 직접 군역에 종사하는 대신 군포(軍布)를 납부했다. 이것이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인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가난한 상민들은 군포 부담에 허리가 휘지만 부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의무조차 없는 모순된 상황을 바꾸는 것이 민생 개혁의 핵심이었다.

현종 때 각종 재이가 발생하자 군역의 폐단 때문에 하늘이 노했다고 해석했다. 이 때문에 현종 말에도 군역개혁론이 논의되었다. 현종 15년(1674) 영의정 김수흥이 “몇 해 전부터 입이 달린 사람이면 모두 ‘재이가 거듭 닥치고 민생이 곤궁하게 된 것은 다 신역의 폐단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변통(變通:개혁)하려고 하면 그 폐단만 말할 뿐 구제의 도(道)는 말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큰 골칫거리입니다(『현종실록』 15년 7월 13일)”라고 말했다.

사실 군역 폐단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종 말 모든 양반은커녕 생원·진사를 제외한 유학(幼學)들에게만 포를 받자는 소변통(小變通:온건개혁론)이 나왔을 때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은 이렇게 반대했다.

“국조(國朝) 300년 이래 사자(士子)를 매우 후하게 대우해 왔습니다. 그 사이에 혹 이름을 빙자해 역(役)을 면한 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체 선비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서로 섞어 똑같이 포를 징수하면 어찌 역(役)을 정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현종실록』 15년 7월 13일)”
유생들도 사대부니 군역을 부담할 수 없다는 항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구상한 것은 전체 사대부들도 똑같은 군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대변통(大變通:급진개혁)이었으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양역 부담을 균등하게 하려고 했다. 현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지패는 종이신분증을 뜻했다. 지패법이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을 산 이유는 반상(班常)의 구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지패법은 다섯 가구를 한 통(統)으로 묶는 오가통법(五家統法)이 전제였다. 오가통법 사목(事目)은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에 따라 모으되, 가구(家口)의 다과(多寡)와 재산의 빈부(貧富)를 물론하고 매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만들고, 한 사람을 통수(統首)로 뽑아 통 안의 일을 맡게 한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고 규정하고 있다.

통-리(里)-면(面)-읍(邑) 순의 행정조직으로 재편한 것인데 ‘재산의 빈부를 물론한다’는 것은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가통법은 또 흉년으로 유망한 백성들을 거주지역의 행정단위로 포섭해 전체 민정(民丁) 숫자를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영의정 허적은 지패법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지패법은 구애되는 일이 있으니, 사대부가 상한(常漢:상놈)의 통수 하에 들어가니 일이 매우 불편합니다”고 토로했다. 오가(五家)의 통수가 상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나마 지패법과 호포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허적이 이 정도면 다른 양반들은 볼 것도 없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지패법에 반대하는 근본 이유는 호포법(戶布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호포법은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오가통 내의 모든 호(戶)에 군포를 걷는 법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백성들이 불편해한다는 명분을 대면서 반발했다. 심지어 벼슬 없는 가난한 유생들에게만 포를 걷는 유포(儒布)제를 실시하려는 것이라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러자 영상 허적이 “이른바 유포(儒布)의 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신부터 아래까지 무릇 호(戶)를 가진 자는 모두 마땅히 포를 낸다면 어찌 유포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숙종실록』 2년 1월 19일)”라고 방어했다. 영의정인 자신부터 호포(戶布)를 낼 것이니 어찌 가난한 유생에게만 걷는 것이냐는 반론이었다.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를 잘 아는 숙종은 “형세를 보아서 시행할 것”이라고 일단 실시를 유보했다.

그러자 조정에 의논시켜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윤휴는 국왕의 결단을 촉구했다.

“마땅히 성상께서 속마음으로 결단을 내려 먼저 덕음(德音)을 발표하셔서 백성들의 해를 제거하시고, 서서히 호포법이나 구산법(口算法)을 의논하셔서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나라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소서. (『숙종실록』 3년 12월 5일)”

사망자나 도주자, 갓난아이의 군포를 가족이나 이웃에게 씌우는 족징(族徵)이나 인징(隣徵)의 폐단부터 먼저 없앤 후 호포법이나 구산법을 논의하자는 말이었다. 호포법이 가호(家戶)를 기준으로 군포를 받는 법이라면 구산법은 양반·상민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에게 군포를 받자는 것이니 호포법보다 근본적인 개혁론이었다. 당연히 양반들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의정 허적도 족징이나 인징의 폐단 등만 일단 해결하는 온건개혁으로 물러섰다. 서인에 비해 열세인 집권 기반으로 구산제와 호포제를 함께 밀어붙이다 정권이 무너진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런 정책 차이 등으로 집권 남인은 급진개혁파인 윤휴 중심의 청남(淸南)과 온건개혁파인 허적 중심의 탁남(濁南)으로 갈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윤휴의 생각은 확고했다.

“물고(物故:죽은 사람), 아약(兒弱:갓난아이)에게서 거두는 포(布)는 먼저 탕감해 주고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호포법을 시행한다면, 군병(軍兵)과 공천(公賤)·사천(私賤)의 제도를 모두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

윤휴의 이 말에 대해 『숙종실록』은 허적·김석주·오시수 등이 모두 놀라, “오늘 논의하는 것은 아약과 물고된 자의 폐단을 변통하는데 불과한데 만약 윤휴의 말대로 한다면 국가 제도를 모두 바꾸어야 할 것이니 결단코 행하기 불가합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윤휴의 ‘군병과 공천·사천의 제도를 모두 변통하자’는 말은 군제 개혁을 통해 신분제의 틀을 흔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신분제를 완화시켜 국력을 증진시키자는 것이 윤휴의 본뜻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윤휴의 지패법은 호패법으로 대체되었다. 벼슬아치들은 상아로 만든 아각패(牙角牌)를 차고, 일반 백성들은 나무로 만든 호패를 차게 했다. 호포제도 사대부들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해 국력을 키울 생각이 없었고 효종이 바라마지 않았던 천재일우의 기회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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